[경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 자본주의의 시작

안녕하세요. 모든 노트입니다. 흔히 대항해시대하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떠올리게 됩니다. 지리경제학 측면에서 보면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자본주의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업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두 국가가 어떻게 대항해시대를 거쳐서 상업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경제지리학과 경제학 경제학은 경제의 보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지향한다. 경제지리학은 지리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경제학 분야이다. 입지 조건이 바뀌면 인문 사회 현상도 바뀐다. 2. 자본주의의 중요 요소 무역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장거리 무역을 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실크로드(Silk Road, 기원전 2세기~서기 15세기 중반 사용된 유라시아 무역망) 자본주의에서 무역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무역이 곧 자본주의는 아니다. 3. 자본주의 경제 요소 사유재산의 자유 보장 자본 재생산, 재축적 매커니즘 확립 4. 자본주의의 시초 서구식 자본주의가 온전한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 발전단계는 신항로 개척 → 상업 자본주의 형성 → 온전한 자본주의 형성의 단계를 거친다. 신항로의 개척이 자본주의의 시초가 된 이유 팍스 몽골리아 시대에는 무역이 활성화되어 유럽인도 비단, 향신료 등 사치품을 즐기게 되었다. 몽골 제국 쇠퇴후 오스만 제국이 부상했으나 유라시아를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면서 동양으로 가는 육로가 막히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수출되는 상품에 과도한 세금을 매겼다. 오스만 제국을 우회하는 아시아로의 무역 루트 개발이 필요해졌다.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에서 정반대의 지리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즉 레콘키스타(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영토를 회복하는 과정)가 발생하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이슬람을 축출한 후 군인들의 보상 문제가 발생하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군인들 보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 진출을 꾀하기에는 프랑스, 이탈리아와 같은 강대국이 가로막고 있었다. ...

[역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일본의 역사 인식

안녕하세요. 모든 노트입니다.

이 글은 EBS 위대한 수업 '하타노 스미오의 일본의 전후 역사 인식' 강의 중 '1강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요약한 글입니다.


우리가 일본의 역사인식 관련 뉴스를 보다 보면 어이없는 기사를 보게 되는데 이 강의에서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냉전 체제의 시작이 맞물리면서 현재의 일본의 역사인식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일본의 국교를 회복하고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체결한 국제 협정으로 전쟁 상태였던 48개국과 체결하였다.
  • 미국이 중심이 되어 체결하였다.

1.1. 샌프란시스코 2장 2조(Chapter II Article 2)

  • (a)항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 (c)항 일본은 쿠릴 열도에 대한 그리고 일본이 1905년 9월 5일의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주권을  획득한 사할린의 일부와 그것에 인접한 도시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 문제점: 영토는 일본 주변 섬들에 대한 포기가 규정되어 있지만 각 영토의 귀속국은 강화 조약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로 인해 독도와 쿠릴 열도는 한일, 러일 간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 이러한 상황은 미국의 조약을 담당했던 존 덜레스(1888~1959, 당시 미국 국무부 특별고문)의 의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미국은 국가 분쟁을 예상하면서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이러한 조약을 만들었다.

1.2.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1조

  • ‘일본은 극동 및 기타 연합 전범 재판소의 판결을 모두 수용하며, 일본에 수감된 일본인에게 부과된 형을 집행할 것입니다.’
  • 즉, 1948년에 완료된 도쿄재판과 아시아 각지에서 진행된 군사재판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 만을 일본 정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사고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또 다른 문제

  • 또 다른 문제는 원칙적으로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미국이 작성한 초안에는 일본이 끼친 피해에 대해 연합국 측은 배상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일본의 경제 부흥을 위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전쟁 배상금에 관한 조항
  • 일본이 생존 가능한 경제를 유지하고 모든 피해와 고통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하는 동시에 다른 의무를 이행하기에는 현재 일본의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도 있습니다.
  • 이러한 협정은 다른 연합국들에게 추가적인 책임을 부과하는 것을 방지하며 원자재 제조가 요구되는 경우 해당 연합국들에 의해 공급되어 일본에 외환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국가 별로 진행한 배상 협상은 양국 간 입장 차이로 난항을 겪었지만, 배상 협상을 매듭지었고, 동남아 국가들에 약 1조엔 정도의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국민 1인당 약 5천엔 이하로 일본 경제에 큰 부담이 되지는 않는 수준이었다.
  • 이 배상금은 상대국의 경제 발전을 돕는 투자라는 개념과 일본의 자금 협력의 형태로 이루어져서 상대국의 경제적 이익 측면에서 어느 정도 만족을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전쟁 배상의 의미가 사라졌다.

 1.4.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서명국

  • 동남아 국가: 일본의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방식 때문에 참가를 거부하였다.
  • 한국, 중국,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도 서명을 거부하였다.


2. 연합국이 작성한 강화조약 초안

  • 일본 재침략의 싹을 자르기 위해 매우 엄격하게 작성되었다.
  • 미국 정부가 1947년에 작성한 초안은 일본 군국주의 부활 저지를 최대 목적으로 하였다. 전쟁 책임, 전범 처벌 재판, 군대 보유 금지, 경제 활동 제한 등 엄격한 배상 의무 등의 조항이 나열되어 있었다.
  • 얄타회담(1945, 독일 패전과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담)을 전제로 한 규정이 나열된 ‘처벌적 평화’의 입장이 투영되었다.
  • 냉전 체제가 아시아로 확대되면서 처벌적인 조약의 방향이 변화되었다.
  • 미국의 세계 정책이 소련 공산주의 확산 방지에 집중되면서 전략적 요충지로서 독일과 일본이 주목 받았다.
  • 6.25 전쟁의 발발은 미국이 일본을 자유 진영으로 정착 시키겠다는 온건파 노선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전쟁 책임과 배상 문제에서 기존 입장(일본 군국주의 부활 저지)을 버리고 일본에 관대한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3. 다른 전후 조약과의 비교

  • 1919년 1차 세계 대전을 종결 시킨 베르사유 조약과 1946년 2차 세계 대전 후의 파리 평화 조약 협정은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였다.
  • 베르사유 조약 제8장 231조: 연합국 및 연합국 정부는 독일과 그 동맹국의 침략으로 인해 전쟁이 초래된 결과로 연합국 및 연합국 정부와 그 국민들이 입은 모든 손실과 피해에 대한 책임을 확인하고 독일은 그 책임을 수용합니다.
  • 파리 강화조약 제1조: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독일, 일본과 함께 삼국 동맹에 가입하고 침략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모든 연합국 및 협력국 그리고 다른 유엔 회원국들과의 전쟁 상태를 초래하였으며, 전쟁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게 되었습니다.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전쟁책임이 일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어디에도 명시하지 않았다.

  

4. 극동국제군사재판(1948년)

  • 일명 도쿄 재판, 일본 주요 전쟁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재판이었다.
  • 도쿄 재판에 기소된 28명의 피고인 특히 교수형에 처한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지도자에게만 전쟁책임을 지게 하는 ‘지도자 책임’을 물었다. 이로써 일본 정부는 대외적으로 일본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도쿄 재판 판결문에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침략 전쟁임을 분명히 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 판결문의 침략 전쟁론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 국가 원수인 일왕(태평양 전쟁 당시 일왕은 쇼와 히로히토(1901~1989))의 전쟁 책임 문제도 강화 조약이나 도쿄 재판에서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것도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논의를 방해한 원인 중 하나이다.
  • 미국은 일왕을 이용해 일본에 대한 점령 정책을 완만하게 하기 위해 일왕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 일본 정부는 도쿄 재판이 끝난 후 B급, C급 전범 석방에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전범형을 받은 군인은 ‘공무상 사망’으로 인정받았고 일반 군인과 마찬가지로 연금이 지급되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 A급 전범으로 형을 받고 사망한 지도자들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었다.
  • 이로써, 전쟁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전범들의 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아있게 되었다.

  

5. 전쟁 책임의 부상 

  •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교과서 문제가 대외적으로 부상하면서 조약 체결 후 30년이 지난 80년대에 다시 전쟁 책임이 부상되었다.
  •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국과 중국의 비판은 받아 들여야야 한다는 입장이다. 
  • 일본 사회에서는 일부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전가 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일본 국민은 피해자일 뿐이라는 인식이 커졌다.


6. 샌프란시스코 이후 양국 간 합의들

  • 1952년 중(중화민국)일평화조약: 타이완 정부는 배상 받는 것을 포기하고, 일본 정부는 법적으로 중국과의 배상금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 1956년 일소공동선언
  •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 1972년 중일공동성명: 중국은 중국의 배상 포기 방침을 침략 전쟁에 대한 책임과 반성을 전제로 하고 역사 인식 문제와 배상 포기를 함께 묶어서 생각하였다. 일본은 중국에 대규모 공적개발원조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전쟁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였다.
  • 양 국간 합의의 공통점은 국가도 개인도 모든 청구권의 상호 포기라는 원칙이 관철되었다. 즉, 법적으로 피해자 ‘개인’의 피해와 손실을 국가에 포함 시킨 ‘일괄 처리’ 조치였다. 한일/중일간의 역사 문제 해결에 큰 장벽이 되고 있다.

  

7. 한국과의 협정

  • 문제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목적은 전쟁에 따른 피해 보상일 뿐, 식민지 지배의 피해 보상은 없었다는 것이다.
  • 한국은 전승국의 입장으로 한일 협정에 임하려 했지만, 한국과 일본이 전쟁한 건 아니라는 이유로 미국과 영국에 의해 거부 당했다.
  • 1952년부터 시작된 한일 협정은 일본이 한반도에 남긴 국유, 사유 재산의 처분, 재일한국인의 처우, 국적 문제 등이 양국 간의 깊은 응어리로 남으면서 난항을 겪게 되었다.      

[ 참고 영상 ]
"하타노 스미오 <일본의 전후 역사 인식> 1강 195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EBS, 2025년 2월 15일

강사: 하타노 스미오(Hatano Sumio)

  • 츠쿠바대 일본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 일본 외교 문서 편찬 위원회 위원(2009~)
  • 일중 역사 공동 연구 일본 측 위원(2006~2009)
  • 본 학술회의 정치학 연구 위원(1995~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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